쓰다 소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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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다 소키치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사상가로, 일본 고대사 연구에 근대 실증주의를 적용하여 기존의 황실 중심 역사관에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특히 신화 관련 부분이 후대에 윤색되었다고 주장하며,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만철 조사부 연구원, 와세다 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신대사의 새로운 연구』, 『일본 상대사 연구』 등이 있다. 그의 연구는 '쓰다 사건'으로 이어져 저서가 발매 금지되기도 했지만, 전후에는 그의 사관이 주류가 되었고, 한국사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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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소키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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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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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쓰다 소키치 |
원어 이름 | 津田 左右吉 (つだ そうきち) |
출생 | 1873년 10월 3일 |
출생지 | 일본 기후현 (岐阜県) 가모군 (加茂郡) 시모요네다 촌 (下米田村) 도치이 촌 (栃井村) (현 미노카모시 (美濃加茂市) 시모요네다 정) |
사망 | 1961년 12월 4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東京都) 무사시노시 (武蔵野市) |
국적 | 일본 |
학력 및 경력 | |
출신 학교 | 도쿄 전문학교 (東京専門学校) |
연구 분야 | 동양사학 동양 철학 |
연구 기관 | 와세다 대학 (早稲田大学) |
시대 | 다이쇼 시대 (大正時代), 쇼와 시대 (昭和時代) |
주요 업적 | 상대사 연구 동양사 연구 |
영향 받은 인물 | 시라토리 구라키치 (白鳥庫吉) |
영향을 준 인물 | 이에나가 사부로 (家永三郎) |
주요 수상 | 아사히상 (朝日賞) (1960년) |
저서 | |
주요 저서 | 『문학에 나타난 우리 국민 사상의 연구 (文学に現はれたる我が国民思想の硏究)』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연구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研究)』 『신대사의 연구 (神代史の研究)』 『일본 상대사 연구 (日本上代史研究)』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上代日本の社会及思想)』 |
2. 생애
1873년 10월 3일, 기후현가모군도치이촌(현 미노카모시 시모요네다정 히가시도치이)에서 쓰다 도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쓰다 가문은 오와리번의 부 가로인 다케코시 가문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다케코시 가문으로부터 명을 받아 이 땅으로 이주했다[2]。
1886년 문명 소학교(미노카모 시립 시모요네다 초등학교)를 졸업. 문명 소학교에서는 사족의 자녀로서 교장 모리 도오루로부터 한적 등의 지도를 받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나고야의 사숙을 전전한 후, 1821년에 오타니파 보통학교(현재의 나고야 오타니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에 중퇴하고 고향의 히가시도치이로 돌아와, 도쿄 전문학교(후의 와세다 대학교)의 교외생으로 강의록으로 공부했다.
1890년에 상경하여, 방어 정치과에 편입. 이듬해 1891년, 도쿄 전문학교 방어 정치과(현재의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3]。
도쿄 전문학교 졸업 후, 개인적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지도를 받았다. 1897년, 지바 보통 중학교의 교사가 되었다[4]。1901년, 28세에 『신선 동양사』를 간행했다.
1908년, 등으로 중학교 교원을 퇴직하고, 만철 도쿄 지사촉탁·만선 지리 역사 조사실 연구원이 되었다. 연구실장은 시라토리 구라키치였다. 만철 조사부의 만주 조선 역사 지리 조사 부문에는, 그 외에 마쓰이 등, 이나바 이와키치, 이케우치 히로시 등이 있었다[6]。쓰다는 이 조사부에서 「발해고」, 「물길고」를 주제로 한 동양사 연구 조사를 실시했다。1913년에는, 이와나미 서점에서 『신대사의 새로운 연구』를 간행. 동 기관은, 1914년에 도쿄 제국 대학문과 대학으로 이관되지만, 이관 시까지 소속했다.
1917년에는 『문학에 나타난 우리나라 국민 사상의 연구』의 제1권을 간행하고, 1921년까지 간행을 계속했다. 1918년, 와세다 대학교 강사로 취임. 동양사, 동양 철학을 가르쳤다[7]。이듬해 1919년, 『고사기와 일본 서기의 새로운 연구』를 발표. 1920년, 와세다 대학교 법학부·문학부교수로 승격.
1924년, 51세에 『신대사 연구』를 발표. 전 저작과 함께, 진무 천황 이전의 신대사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사료 비판을 행한 것이었다. 1927년, 『도가의 사상과 그 개전』을 발표. 1930년에는 『일본 상대사 연구』, 1933년에는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1935년에는 『좌전의 사상사적 연구』, 1937년에는, 소저 『지나 사상과 일본』, 1938년에는 『유교의 실천 도덕』 『반산·익헌』과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939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강사를 겸임하여, 동양 정치 사상사의 강좌를 맡았다.
1939년(쇼와 14년), 『일본서기』의 쇼토쿠 태자 관련 기술에 대해 실재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을 두고 미노다 무네키·미츠이 코우시에게 “일본정신 동양문화 말살론에 귀착하는 악마적 허무주의 무쌍흉악사상가”라고 공격당했다. 1940년(쇼와 15년) 1월 문부성의 요구로 와세다 교수직을 사임했다. 같은 해 2월 10일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연구』, 『신대사의 연구』, 『일본상대사연구』,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4권이 발매금지 처분되었다. 쓰다 및 쓰다의 책을 출판한 이와나미 시게오는 같은 해 3월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죄로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기소되었다.[9][10]
쓰다가 지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8]
- 고사기와 일본 서기의 원인이 된 것은 황실 계보인 「제기」, 궁정에서 전해져 온 설화의 집합체인 「구사」이다.
- 제기와 구사가 성립된 것은 6세기 게이타이 천황~긴메이 천황 시기이다.
- 제기의 계보는 모두 사상이 아니고, 적어도 15대 오진 천황 이전(14대 주아이 천황이나 13대 세이무 천황 이전)의 천황은 창작된 비실존 인물이다.
- 구사의 대부분, 특히 신화 부분은 6세기 궁정 관인이 상고부터 천황이 국토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사실적인 자료 가치는 전혀 없다.
검찰 측의 기소 이유는 다음과 같으며, 쓰다의 주장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 『고사기 및 일본 서기의 연구』 『신대사 연구』 『일본 상대사 연구』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 * 진무 천황(초대)부터 주아이 천황(14대)까지의 역대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사가 있다.
> * 진무 동정 및 게이코 천황의 지쿠시 순행·구마소 친정, 일본 무존의 구마소 정벌·동국 경략, 진구 황후의 삼한 정토 등, 상대에 있어서의 황실의 사적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 * 현인신인 천황의 지위는 제사를 행하는 역할에 유래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신대사 작자가 관념상 창작한 것으로 하고 있다.
>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시작으로 하는 황실 계보상의 신들은 조정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창작된 존재로 하고 있다.
> * 고교쿠 천황 이전의 신칙, 조칙은 모든 사람의 창작한 것으로 하고 있다.
> * 주아이 천황 이전의 황통도에는 의도적으로 손이 더해지고 있다고 한다.
> * 닌토쿠 천황의 인정을, 중국의 사상을 바탕으로 창작된 이야기로 하고 있다.
> * 황실 계보의 신들은, 천황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황실의 권위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상의 존재라고 하고 있다.
>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니니기노미코토에 준 신칙에는, 중국의 사상을 포함하고, 또한 일본 서기 편자의 손이 더해지고 있다고 한다.
>
> 이것은 어느 것도 황실의 존엄을 범하는 것이며, 출판법 제26조에 위반한다[11]。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전후에는 황국사관을 부정하는 "쓰다 사관"이 오히려 주류가 되었다.
쓰다는 반공주의자로서 전후 공산주의 유행에 비판적이었다.[29] 1946년(쇼와 21년) 잡지 『세계』 제4호에 「건국의 사정과 만세일계의 사상」에서 “천황제는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민주주의와 천황제는 모순되지 않는다”며 천황제 유지를 논했다.[19] 그래서 천황제 폐지론자들에게 변절자라고 비판당했다.[21] 하지만 쓰다는 원래 천황제를 입헌군주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일관되게 생각했기에 딱히 변절한 것은 아니었다.
1947년(쇼와 22년) 제국학술원(동년 일본학사원으로 개칭)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2] 1961년 12월 4일, 노쇠 때문에 도쿄도무사시노시사카이의 자택에서 사망[23]。묘소는 니자시헤이린지에 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73년 10월 3일, 기후현가모군도치이촌(현 미노카모시 시모요네다정 히가시도치이)에서 쓰다 도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쓰다 가문은 오와리번의 부 가로인 다케코시 가문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다케코시 가문으로부터 명을 받아 이 땅으로 이주했다[2]。1886년 문명 소학교(미노카모 시립 시모요네다 초등학교)를 졸업. 문명 소학교에서는 사족의 자녀로서 교장 모리 도오루로부터 한적 등의 지도를 받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나고야의 사숙을 전전한 후, 1821년에 오타니파 보통학교(현재의 나고야 오타니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에 중퇴하고 고향의 히가시도치이로 돌아와, 도쿄 전문학교(후의 와세다 대학교)의 교외생으로 강의록으로 공부했다.
1890년에 상경하여, 방어 정치과에 편입. 이듬해 1891년, 도쿄 전문학교 방어 정치과(현재의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3]。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지도를 받았다.[35] 1901년 28세로 『신찬동양사』를 간행했다. 1908년까지 치바중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2. 2. 역사 연구와 저술 활동
쓰다 소키치는 1891년에 도쿄전문학교(와세다 대학의 전신) 방어정치학과를 졸업하고,[35]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지도를 받았다. 1901년 28세에 『신찬동양사』를 간행하고, 1908년까지 치바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1908년부터 남만주철도(만철) 도쿄지사 촉탁으로 만선지리역사조사실 연구원이 되어[36] 『발해고』, 『물길고』 등 고대 동양사를 연구했다. 이 기관은 1914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에 이관될 때까지 근무했다. 1913년에는 이와나미 서점에서 『신대사의 새로운 연구』를 간행했다.
1917년 『문학에 나타난 다가오는 우리 국민사상 연구』를 간행, 1921년까지 속간했다. 1918년 와세다 대학 강사로 취임하여 동양사와 동양철학을 가르쳤다.[7] 1919년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새로운 연구』를 발표하고, 1920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1924년 51세에 『신대사의 연구』를 발표, 진무 천황까지의 신화시대 역사를 연구대상으로 사료비판을 가했다.
1927년 『도가의 사상과 그 개전』, 1930년 『일본상대사연구』, 1933년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1935년 『좌전의 사상사적 연구』, 1937년 『지나사상과 일본』, 1938년 『유교의 실천도덕』을 간행하며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했다.
1939년 도쿄제대 법학부 동양정치사상사 강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쓰다는 기기 신화나 『일본 서기』에 있어서의 쇼토쿠 태자 관련 기술에 대해 실존성을 포함해 비판적으로 고찰하여,1940년 그의 저서 4권이 발금 처분을 당하는 쓰다 사건을 격게 된다.[8]
전후, 쓰다는 1946년 잡지 『세계』 제4호에 발표한 논문 「건국의 사정과 만세일계의 사상」에서, 「천황제는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천황제는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천황제 유지를 논했다.[19]
2. 3. 쓰다 사건
1939년(쇼와 14년), 『일본서기』의 쇼토쿠 태자 관련 기술에 대해 실재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을 두고 미노다 무네키·미츠이 코우시에게 “일본정신 동양문화 말살론에 귀착하는 악마적 허무주의 무쌍흉악사상가”라고 공격당했다.[37] 1940년(쇼와 15년) 1월 문부성의 요구로 와세다 교수직을 사임했다. 같은 해 2월 10일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연구』, 『신대사의 연구』, 『일본상대사연구』,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4권이 발매금지 처분되었다. 쓰다 및 쓰다의 책을 출판한 이와나미 시게오는 같은 해 3월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죄로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기소되었다.[9][10]쓰다가 지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8]
- 고사기와 일본 서기의 원인이 된 것은 황실 계보인 「제기」, 궁정에서 전해져 온 설화의 집합체인 「구사」이다.
- 제기와 구사가 성립된 것은 6세기 게이타이 천황~긴메이 천황 시기이다.
- 제기의 계보는 모두 사상이 아니고, 적어도 15대 오진 천황 이전(14대 주아이 천황이나 13대 세이무 천황 이전)의 천황은 창작된 비실존 인물이다.
- 구사의 대부분, 특히 신화 부분은 6세기 궁정 관인이 상고부터 천황이 국토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사실적인 자료 가치는 전혀 없다.
검찰 측의 기소 이유는 다음과 같으며, 쓰다의 주장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 『고사기 및 일본 서기의 연구』 『신대사 연구』 『일본 상대사 연구』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 진무 천황(초대)부터 주아이 천황(14대)까지의 역대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사가 있다.
> # 진무 동정 및 게이코 천황의 지쿠시 순행·구마소 친정, 일본 무존의 구마소 정벌·동국 경략, 진구 황후의 삼한 정토 등, 상대에 있어서의 황실의 사적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 # 현인신인 천황의 지위는 제사를 행하는 역할에 유래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신대사 작자가 관념상 창작한 것으로 하고 있다.
>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시작으로 하는 황실 계보상의 신들은 조
2. 4. 전후 활동과 사망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전후에는 황국사관을 부정하는 "쓰다 사관"이 오히려 주류가 되었다.쓰다는 반공주의자로서 전후 공산주의 유행에 비판적이었다.[42] 1946년(쇼와 21년) 잡지 『세계』 제4호에 「건국의 사정과 만세일계의 사상」에서 “천황제는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민주주의와 천황제는 모순되지 않는다”며 천황제 유지를 논했다.[39] 그래서 천황제 폐지론자들에게 변절자라고 비판당했다.[40] 하지만 쓰다는 원래 천황제를 입헌군주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일관되게 생각했기에 딱히 변절한 것은 아니었다.
1947년(쇼와 22년) 제국학술원(동년 일본학사원으로 개칭)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2] 1949년(쇼와 24년) 문화훈장 수훈. 1960년(쇼와 35년)에는 미노카모시 명예시민 제1호로 선정되었다.
1961년(쇼와 36년) 노쇠 때문에 도쿄도 무사시노시 사카이의 자택에서 사망.[23] 향년 88세. 묘소는 니자시헤이린지에 있다.
3. 주요 연구 업적
3. 1. 일본 고대사 연구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특히 신화 관련 부분이 후대에 윤색되었다고 보고 사료 비판을 시도했다.[24] 이는 메이지 시대 이후 근대 실증주의를 일본 고대사에 적용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성립 과정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황실의 역사를 의심하는 것으로 이어져 금기시되었다. 쓰다는 저서를 통해 기기에 대한 근대적인 사료 비판을 전면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4]쓰다의 개별적인 주장은 인상론적인 면이 있어 비판도 받았으며, 사카모토 타로와 이노우에 미츠사다는 쓰다 등의 연구가 "주관적 합리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역사학계 외부에서는 쓰다가 역사 사료 외에 고고학과 민속학의 지견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카모토와 이노우에를 비롯한 전후 문헌사학자들은 쓰다의 문헌 비판의 기본적인 구성을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기기 기술에 대해서는 "단독으로는 증거력이 빈약하다"고 평가한다.
쓰다는 기기 신화가 천황의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6세기 중엽( 게이타이부터 킨메이조)에 만들어진 설화이며, 다양한 윤색을 거쳐 8세기 초에 현재의 기기 신화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은 야마토 왕조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진무 천황부터 9대 가이카 천황(결사 팔대)까지는 창작된 인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최초로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는 천황은 10대 스진 천황이며, 13대 세이무 천황, 14대 주아이 천황과 그의 비 진구 황후는 실존하지 않는 창작 인물이라고 주장했다.[25][26]
부레츠 천황의 포악 기사가 날조라는 쓰다의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기기의 편찬자가 상서, 한비자, 여씨춘추, 사기 등에 등장하는 왕조 최후의 폭군인 걸과 주를 참고하여 포악 기사를 썼다고 주장했다.[27]
이처럼 기기 신화 연구를 크게 발전시킨 쓰다의 사관은 현재 역사학에서 정설로 평가받고 있다.
3. 2. 동양사상 연구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중·일·인도에 공동의 생활과 공동의 역사가 없다는 이유로 "동양"이라는 구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28] 쓰다는 일본 사상 형성에 미치는 중국 철학의 영향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며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29] 중국 철학 등에 대한 실증 연구에서도 영향을 미쳤지만, 유교는 인간성을 무시한다며 중국 사상은 "특수한 부정적인 것"이라며 비판적이었다.[29] 또한 근대 서양 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근대주의자이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사람들에게 특유한 탈아론적인 국가주의"를 체현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29][30]일본 사상사에 관해서는, 『문학에 나타난 우리 국민 사상의 연구』(전 4권)라는 방대한 저서가 있으며, 현재는 이와나미 문고 전 8권에 수록되어 있다. 고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 다루었으며, 미완으로 끝났지만, 『유신의 사상사』 등에서 그 후의 전개를 알 수 있다.
고대조차 한·일 간에 친근감이 없었던 것이 명백하다며 한일 병합에도 부정적이었다.[31]
쓰다의 지도를 받은 이병도/이병도한국어 (1896년 - 1989년)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회 위원을 거쳐 1934년 진단학회 이사장에 취임했고, 1945년에는 경성제국대학 문리학부 교수가 되었지만, 전후에도 계속하여 대한민국 문교부 장관, 대한민국 학술원 원장을 역임하며 한국의 역사학을 주도했다.[32] 이병도는 쓰다의 방법론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를 견인했다. 한편 이러한 이병도에 대해 한국 민족사관에서는 식민사관/식민사관한국어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이병도 및 쓰다 소키치의 사관(예를 들어 임나일본부에 관한 견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한사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견해)도 비판받고 있다.[33]
3. 3. 한국사 관련 연구
4. 평가와 영향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후세의 윤색이 현저하다고 문헌비판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유입된 근대실증주의를 일본 고대사에 적용하여 기기의 성립 과정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한 것이다. 딱히 쓰다가 일본에서 사료비판을 최초로 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현대 역사학에서 역사의 재구성은 동시대 사료를 우선해야 하며, 후세에 쓰인 『헤이케모노가타리』, 『태평기』 같은 것을 사료비판 없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적 원칙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고대사에 적용하는 것은 황실의 역사를 의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에 금기시되었다. 그것을 처음 때리고 고대사에도 사료비판을 전면적으로 적용한 데 그의 의의가 있다.[41]
하지만 쓰다가 기기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천황제를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쓰다는 일본의 사상 형성에서 중국사상의 영향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42]
쓰다의 개별 주장 중에는 인상론적인 것도 많아서 후대의 사카모토 타로, 이노우에 미츠사다 등에게 비판받았다.[43]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전후 문헌사학자들은 쓰다의 문헌비판의 기본적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일본 측 기록은 한국이나 중국 사료에 같은 기록이 없으면 증거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밖에는 쓰다가 사료만을 신용하여 고고학이나 민속학적 지식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44]
중국사에 대한 실증연구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유교가 인간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중국사상은 “특수하게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서양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따라서 메이지 시대 인물 특유의 탈아론적 국민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된다.[42][45]
한국사에 관해서도 일본사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여겨져 평가가 박하다.[46] 이병도의 지도교수였다.
4. 1. 긍정적 평가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후세에 윤색되었다고 문헌비판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유입된 근대실증주의를 일본 고대사에 적용하여 기기의 성립 과정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한 것이다. 쓰다가 일본에서 사료비판을 최초로 한 것은 아니지만, 고대사에도 사료비판을 전면적으로 적용하여 황실의 역사를 의심하는 금기를 깬 의의가 있다.[41]쓰다는 기기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천황제를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사상 형성에서 중국사상의 영향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42]
쓰다의 개별 주장 중에는 인상론적인 것도 많아서 후대의 사카모토 타로, 이노우에 미츠사다 등에게 비판받았다.[43]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전후 문헌사학자들은 쓰다의 문헌비판의 기본적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다.[44]
중국사에 대한 실증연구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유교가 인간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중국사상은 “특수하게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서양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따라서 메이지 시대 인물 특유의 탈아론적 국민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된다.[42][45]
한국사에 관해서도 일본사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여겨져 평가가 박하다.[46] 이병도의 지도교수였다.
4. 2. 부정적 평가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후세에 윤색되었다고 문헌비판했다. 이는 근대실증주의를 일본 고대사에 적용하여 기기의 성립 과정에 합리적인 설명을 가한 것이다. 현대 역사학에서 후대에 쓰인 사료를 비판 없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대사에 적용하는 것은 황실의 역사를 의심하는 것으로 연결되기에 금기시되었으나, 쓰다는 이를 처음으로 비판하고 고대사에도 사료비판을 전면적으로 적용했다.[41]하지만 쓰다가 기기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천황제를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쓰다는 일본의 사상 형성에서 중국사상의 영향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42]
쓰다의 개별 주장 중에는 인상론적인 것도 많아서 후대의 사카모토 타로, 이노우에 미츠사다 등에게 비판받았다.[43] 하지만 전후 문헌사학자들은 쓰다의 문헌비판의 기본적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일본 측 기록은 한국이나 중국 사료에 같은 기록이 없으면 증거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밖에는 쓰다가 사료만을 신용하여 고고학이나 민속학적 지식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44]
중국사에 대한 실증연구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유교가 인간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중국사상은 “특수하게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서양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따라서 메이지 시대 인물 특유의 탈아론적 국민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된다.[42][45]
한국사에 관해서도 일본사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여겨져 평가가 박하다.[46] 이병도의 지도교수였다.
4. 3. 영향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후세에 윤색되었다고 문헌비판했다.[41]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유입된 근대실증주의를 일본 고대사에 적용하여 기기의 성립 과정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한 것이다. 현대 역사학에서 역사의 재구성은 동시대 사료를 우선해야 하며, 후세에 쓰인 사료는 비판 없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고대사에 적용하는 것은 황실의 역사를 의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에 금기시되었다. 쓰다는 이를 처음으로 비판하고 고대사에도 사료비판을 전면적으로 적용했다.[41]하지만 쓰다가 기기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천황제를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쓰다는 일본의 사상 형성에서 중국사상의 영향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42]
쓰다의 개별 주장 중에는 인상론적인 것도 많아서 후대의 사카모토 타로, 이노우에 미츠사다 등에게 비판받았다.[43]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전후 문헌사학자들은 쓰다의 문헌비판의 기본적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일본 측 기록은 한국이나 중국 사료에 같은 기록이 없으면 증거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밖에는 쓰다가 사료만을 신용하여 고고학이나 민속학적 지식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44]
중국사에 대한 실증연구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유교가 인간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중국사상은 “특수하게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서양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따라서 메이지 시대 인물 특유의 탈아론적 국민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된다.[42][45]
한국사에 관해서도 일본사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여겨져 평가가 박하다.[46] 이병도의 지도교수였다.
5. 저작 목록
쓰다 소키치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주요 단독 저서로는 『신선 동양사』 (호에이칸(宝永館) 1901), 『조선 역사 지리』 (남만주 철도(南満洲鉄道) 1913), 『신대사의 새로운 연구』 (니쇼도 서점(二松堂書店) 1913), 『문학에 나타난 우리나라 국민 사상의 연구』 (라쿠요도(洛陽堂) 1917-21,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1975,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1977-78, 복간 1990, 2004),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새로운 연구』 (라쿠요도(洛陽堂) 1919, 마이니치 원즈(毎日ワンズ) 2012, 신서판 2018), 『신대사 연구』 (이와나미 서점 1924), 『도가(道家)의 사상과 그 개전』 (동양 문고(東洋文庫) 〈동양 문고 논총〉 1927), 『일본 상대사 연구』 (이와나미 서점 1930, 신판 1979),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 (이와나미 서점 1933), 『좌전(左伝)의 사상사적 연구』 (동양 문고(東洋文庫) 〈동양 문고 논총 제22〉 1935) 등이 있다.
또한, 『지나 사상과 일본』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 적판 1937, 여러 차례 복간, 이와나미 서점 「이와나미 신서」 대판 1984), 『유교(儒敎)의 실천 도덕』 (이와나미 서점 1938), 『구마자와 반잔(熊沢蕃山)・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이와나미 서점 〈대교육가 문고〉 1938, 복간 1984), 『논어와 공자의 사상』 (이와나미 서점 1946, 복간 1974), 『역사의 모순성』 (다이요 출판사(大洋出版社) 1947), 『일본 상대사의 연구』 (이와나미 서점 1947), 『일본인의 사상적 태도』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1948), 『학문의 본질과 현대의 사상』 (이와나미 서점 1948), 『일본 고전의 연구』 (이와나미 서점 1948-50), 『일본의 신도』 (이와나미 서점 1949, 클레스 출판 〈신도 연구 선집 제6권〉 2014), 『오모이다스마마』(おもひだすまゝ) (이와나미 서점 1949), 『필연·우연·자유』 (가도카와 신서(角川新書) 1950), 『유교의 연구』 (이와나미 서점 (전 3권) 1950-56), 『제 민족에서의 인간 개념』 (국제연합 출판사 1951), 『일본의 황실』 (와세다 대학 출판부(早稲田大学出版部) 1952, 주오코론 신샤(中央公論新社) 「중공 클래식스(中公クラシックス)」 2019[34]), 『일본 문예의 연구』 (이와나미 서점 1953), 『역사의 취급법 역사 교육과 역사학』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1953), 『지나 불교의 연구』 (이와나미 서점 1957), 『역사학과 역사 교육』 (이와나미 서점 1959), 『사상·문예·일본어』 (이와나미 서점 1961)를 저술하였다.
그의 저작은 사후에 『쓰다 소키치 역사 논집』 (이마이 오사무 편, 이와나미 문고 2006), 『쓰다 소키치 셀렉션』 (쇼시 심수(書肆心水) 2012),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사상사』 (쇼시 심수(書肆心水) 2013), 『황실과 일본 패전 후 황실 논의의 요체』 (쇼시 심수(書肆心水) 2017) 등의 선집과 『쓰다 소키치 전집』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전 28권, 별권 5권) 1963-66, 복간 보권 2권 1986-89) 전집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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